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는 대한항공 858기가 교신이 끊긴 후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나중에 밝혀진 정황으로, 858기는 한국 시간으로 14시 1분경 정시 방콕 도착 시간과 위치 정상이라는 최후의 교신을 한 후에 미얀마 상공에서 공중 폭발한 것으로 드러났는데요.
멀쩡하던 비행기가 갑자기 공중 폭발해버린 이 대참사로 인해 승무원을 포함한 115명의 탑승자 전원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이 중 대부분은 대한민국 국민들이었죠.
사건의 원인은 비행기 내부에서의 폭발물로 인한 폭발 사건,
즉 누군가 의도적으로 폭파시킨 테러였습니다.
이에 858기가 경유했던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주재 한국대사관이 신속히 조사에 착수했고, 단 이틀 만에 행적이 의심스러운 용의자 2명을 검거하는 데 성공합니다.
2명의 용의자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은이었습니다.
이들의 당시 위장 이름은 하치아 시니치와 하치야 마음이었죠.
사실 이 사건은 김정일의 계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해인 1987년은 남북한 모두에게 서로 상반된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해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따내면서 국제사회에 당당히 도약하고 있던 시기였고, 반대로 소련과 중국이 개혁 개방 정책을 펼침으로써 북한은 점점 고립되면서 입지가 불안해져 갔습니다.
북한은 특히 서울 올림픽에 대해 대단히 못마땅해 했는데, 이전의 두 번의 올림픽과 다르게 88올림픽에서는 공산권과 자유지능의 대표적인 국가들이 모두 참가를 결정한
평화의 장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북한은 더더욱 남한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은 대한민국에게 올림픽 일부 종목을 떼어 북한 지역에서 개최시켜달라는 제안도 하지만, 대한민국을 비롯한 ioc는 북한의 요구를 거절하였죠.
이렇듯 북한이 국제사회의 왕대가 되어가는 한편, 남한에서는 6월 항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대통령 선거 문제 등 여러 이슈들이 터져나오게 되는데,
북한은 이 타이밍을 노려 남한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킴과 동시에 올림픽 개최를 무산하려는 계획을 진행합니다.
평화와 화합의 상징인 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에서 여러 가지 위협적인 테러 사건이 발생한다면, 대한민국의 안전 문제에 대해 세계 여론이 반감을 표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올림픽 또한 무산될 것이라는 입장이었죠.
다시 말해, 안전 문제를 세계 여론화하여 서울 올림픽 자체를 개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 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계획은 당시 북한의 대남 정책을 담당했던 김정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며, 이미 1년 전인 1986년에는 서울 아시안게임의 개막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김포공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죠.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건은 범인의 실체를 잡지 못한 미제 사건으로 남았지만, 북한의 소행으로 강력히 추정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88올림픽을 앞두고 남한의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남조선 항공기를 공중에서 폭파시킨다는 작전을 구상했고,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공작원 양성을 면밀하게 주도했습니다.
이때 공작원으로 선발된 인물이 바로 김승일과 김혜은이었습니다.
70세의 김승일은 이미 1950년대부터 수차례의 대남 공작을 자행했던 공작원이었고, 25세의 김현희는 평양 외국어 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엘리트 여성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부녀지간으로 위장해, 1984년부터 비엔나,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현지 적응 훈련을 했고, 외국어 엘리트답게 중국어와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한 교육도 받았습니다.
특히 공작 경험이 처음인 김현희는 치밀한 신분 이장을 위해 아예 일본인처럼 생활하는 생활 습관까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고, 무의식 중에 나올 수 있는 여러 습관도 꼼꼼히 체크하여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10월 7일, 두 사람은 김정일로부터 작전 수행을 의미하는 친필 공작 지령을 받습니다.
한 달간의 준비를 마친 김승일과 김현희는 평양을 떠나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동합니다.
이때 두 사람은 국경을 이동하면서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사용했고, 오스트리아에 도착하자 호텔에 머무르면서 본격적으로 테러를 저지르기 위한 준비에 착수합니다.
목표는 이라크에서 서울로 향하는 대한항공 858편.
이 비행기는 이라크에서 출발하여
아부다비와 방콕을 경유하고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에서 이라크행 티켓을 끊었고, 테러 성공 이후 도피하기 위한 항공권도 발권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또 다른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로부터 폭탄이 든 파나소닉 휴대용 라디오와 액체 폭탄이 담긴 술병을 넘겨받았죠.
계획된 날인 1987년 11월 29일, 두 테러범은 비행기에 타기 전 먼저 라디오를 해체하여 내부에 폭발물을 설치했는데,
공항 검색대에 걸릴 때 멀쩡한 일반 라디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라디오 작동 장치는 그대로 둔 후, 남은 공간에만 소량의 폭발물을 설치하는 치밀함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폭탄의 폭발 시간을 9시간 뒤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폭탄을 든 두 사람은 이라크의 바그다드 공항으로 이동해 목표물인 서울행 대한항공 858기에 탑승합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대한항공 858기는 이라크를 출발하여 아부다베르, 경유, 그리고 방콕까지 경유한 후 서울에 도착한 루트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폭탄을 기내에 설치하고, 첫 번째 경유지인 아부다비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예정이었습니다.
기내에 탑승한 이들은 쇼핑백에 넣어 소지하고 있던 시한장치 폭발물을 좌석 번호 7b와 7c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경유지인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폭탄이 든 쇼핑백을 그대로 둔 채 유유히 빠져나갑니다.
폭탄의 시간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대한항공 팔로팔기는 다시 태국 방콕으로 향하고 있었죠.
그리고 그들이 설정한 시간이었던 11월 29일 14시 5분경, 두 테러범이 설치한 폭탄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함에 따라, 팔로팔기는 인도양 상공에서 공중 폭파되었습니다.
당시 탑승자 115명은 전원 사망하였죠.
수사 이틀째인 11월 1일까지 비행기가 어떻게 폭파된 것인지 알 수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었으나, 일본인 남녀 승객 2명이 출국을 시도하다가 위조 여권 사용으로 검거되면서
사건의 실마리를 잡게 됩니다. 이들은 당시 바레인 공항에서 로마로 도피할 예정이었으며, 남자 쪽은 위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김현이었던 하츠 마의 여권번호가 위조임이 판명되면서, 긴급히 2명의 출국 정지 및 조사가 진행됩니다.
로마행 비행기는 이미 떠나버렸고, 이들은 곧바로 앙기부와 공조 수사를 진행하고 있던 현지 조사단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과 김현희는 미리 준비한 독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하였고, 중태에 빠져 국립병원으로 긴급 수송되었으나, 김승일은 그대로 사망, 김현희는 회생하게 됩니다.
폭파된 대한항공 858기는 사건 발생 15일 만인 12월 13일에 범화 동남쪽 해상에서 부유물 잔해가 발견되면서 비행 중 폭발에 의한 추락임이 최종 확인되었으며, 검거된 김현희는 12월 14일에 대한민국으로 압송됩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중동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던 한국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김현희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국제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테러범의 정체가 20대의 젊은 여성임이 밝혀지자, 이 사건은 더욱 주목받게 되었죠.
압송된 김현희는 남산에 위치한 안기부 조사실에서 신문을 받게 되는데, 조사 끝에 모든 것을 실토한 김현희는 다음해인 1988년 1월 15일에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범이며, 김정일의 재령을 받아 이 같은 공작을 자행했다고 발표합니다.
이것으로 이 사건은 북한 김정일에 의한 대남 공작 테러로 최종 판명되었습니다.
김혜리는 재판 끝에 1990년 3월 27일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불과 16일 만인 4월 12일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이때 김현희를 사면한 이유에 대해서, 노태우 대통령은 김현희를 역사의 상징인으로 수용하겠다라고 하여 큰 논란이 되기도 했죠.
사면을 받아 목숨을 부지한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여 현재까지도 살고 있습니다.
1996년에 발행된 동아일보 신문에 따르면, 김정일은 북한에 남아있던 김현희의 부모와 동생들, 김현희를 귀국시켰던 노동당 조사부 간부들까지 대거 요덕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고 합니다.
한편,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에 대해서는 여느 사건과 다름없이 음모론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김은희가 입국한 날짜가 바로 대통령 선거 하루 전인 것, 그리고 사형 선고 후 마치 짜여진 듯이 사면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김현희의 기자회견과 여러 정황들을 볼 때, 이 사건은 북한 김정일의 지령에 의한 명백한 테러 사건임이 탐명되었죠.
김현희는 사면 이후 1993년에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회고록을 내어 자신의 삶과 당시 사건에 대한 내용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1997년에는 자신의 수사를 맡았던 안기부 직원과 결혼을 하여 자녀들을 낳아 살고 있습니다.
121 사태의 김신조처럼 군 안보 강연도 다니고, 각종 매체 인터뷰에 응하며, 종종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현재는 그녀의 출신과 행적으로 인해 국정원의 감시와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책 인쇄를 유가족들에게 전달 및 평생 참여하면서 살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끝으로 억울하게 희생되신 이 사고의 모든 희생자분들에게 조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