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소의 창업자 박정부 회장 고이 잠든 그를 단 한 방에 깨울 수 있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다이소는 일본 회사 아니에요? 다행히 이제는 많이 알려졌지만 다이소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일본 회사라는 오명에 시달려왔는데요.
그런 오해를 마주할 때마다 박 회장의 속은 썩어 문드러졌을 겁니다.
왜냐? 다이소는 창업 이래 30여 년간 일본에 갑질을 당해온 회사거든요.
특히 일본의 대창산업 다이소 산교에게 말입니다.
박정부 회장과 일본 다이소의 인연은 1988년 시작됐습니다.
당시 박 정 부회장은 한국에 값싸고 품질 괜찮은 공산품을 떼어다가 일본 백엔숍에 납품하고 있었는데요.
거래처를 늘리기 위해 참석한 백엔숍 연합회 행사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납니다.
바로 야노 히로타케 일본 다이소산교의 회장이었죠.
실패하면 할복을 하겠다고 했을 정도로 사업의 진심이었던 야노 회장은 납품업체에 가혹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업체 대표의 면전에다 대고 이렇게 외쳐댔습니다.
어디서 이런 쓰레기를 들이밀어 박정부 회장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거래를 트고 나서 폭언은 물론이고 부하직원이 있는 앞에서 면박을 당하기도 일쑤였습니다.
1944년 일제강점기에 끝무에 태어난 박 회장 일본을 향한 분노가 왜 없었을까요?
그가 느낀 모멸감은 다른 일본인 사장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을 겁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성실했던 그는 오기를 발휘합니다.
어떻게든 저 고약한 야노를 만족시키겠다 굳게 마음을 다지죠.
그리고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찾아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닙니다.
5년이란 시간 동안 박정부 회장은 야노 회장에게 큰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신임을 얻었더니 이번엔 새로운 갑질이 시작됐습니다.
야노 회장은 벼랑간 다이소 상교에게 주문한 상품은 다른 경쟁사에 공급하지 말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최대한 많은 거래처를 확보해서 최대한 많은 물량을 주문해야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사업이었습니다.
야노 회장이 그걸 모를 리 없었죠. 하지만 다이소산교가 일본 베엔숍 업계를 평정하고 있던 시기여서 박 회장은 이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간신히 다른 상품을 추가로 개발해서 다른 업체와의 거래를 이어나가죠.
1년이 지나고 야노 회장은 다시 박 회장을 호출했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다른 백엔숍을 만나지 말라는 요구였습니다.
좋게 보면 박 전 부회장의 물건에 대한 인정이었습니다.
독점하고 싶다는 뜻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박 회장은 아찔했습니다.
회사의 운명을 전적으로 다이소 상교에 맡겨야 하는 셈이었으니까요.
야노 회장의 변덕 한 번에 회사가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박 회장은 야노에게 우리 물건을 독점으로 공급받고 싶다면 우리 회사에 지분을 태우라고 제안합니다.
자기 돈이 들어가면 쉽게 내팽개치지는 않을 거란 심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야노 회장은 반응이 없었죠. 야노 히로타케는 아주 집요했습니다.
박 회장이 다른 거래처를 만나는 일이 없도록 일부러 공항까지 태워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박 전 부회장은 발권소 앞까지 갔다가 야노의 차가 떠나는 걸 보고 난 뒤에야 공항을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이렇게 지독한 경영 덕분이었을까요? 다이소산교는 일본에서 승승장구합니다.
매장은 금세 1천 개를 돌파하고 일본 베엔숍 시장의 60%를 석권합니다.
박 회장의 사업도 다이소산교와 함께 급성장했는데요.
하지만 성장이 거듭될수록 불안의 씨앗도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박 회장은 우리나라로 고개를 돌리는데요.
박 회장은 사업의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한국에 직접 균일가 매장을 차립니다.
1977년 5월 강동구 천호동의 아스코이븐프라자라는 이름의 대한민국 최초의 균일가 매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이상한 이름은 박 회장의 회사 아성 코퍼레이션의 앞글자를 딴 아스코와 균일가를 뜻하는 이분을 조합한 건데요.
네이밍 센스는 단언컨대 최악이었습니다. 하지만 때는 1997년 아스코이븐프라자가 문을 연 지 6개월 만에 IMF가 터지면서 박 회장은 큰 기회를 맞이합니다.
모두가 허리를 꽉 졸라매던 시절이었습니다. 싸고 품질 좋은 상품에 대한 니즈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죠.
덩달아 비슷한 매장을 차리는 경쟁자들도 늘어났지만 수년 동안 야노에게 시달리며 실력을 갈고닦은 박 회장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했죠. 불경기를 타고 아스코이븐프라자는 불과 4년 만인 2001년 매장을 10호점까지 늘리는 데 성공합니다.
한국 매장이 대박을 터뜨리자 처음엔 들은 척도 안 하던 야노 회장이 움직였습니다.
그때가 돼서야 지분을 투자하겠다고 의사를 밝혀오죠.
박 회장은 아무리 아스코가 잘되는 와중이었다지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 다이소에 납품하는 매출이 여전히 전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죠.
야노 히로타케 정말 얄밉지만 사업 수업만큼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박 회장의 능력이야 수년간 이미 확인한 상태.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오는 한국의 시장성도 불을 보듯 뻔했을 겁니다.
이때 야노가 투자한 5억 엔은 훗날 100배로 불어납니다.
비록 지분 투자는 받았지만 박 회장의 균일가 매장은 이름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일본 다이소에게 영향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이소를 연상시키는 이름만 가져오고 전혀 교류가 없었던 건데요.
로열티를 낸 적도 없고 로고도 다릅니다. 얼마간 배당을 지급하긴 했고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박 회장의 말이고요. 일본 다이소산교의 웹사이트에 가보면 여전히 2001년, 그러니까 야노가 박 회장에게 지분을 투자한 시점에 한국 진출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전혀 관계없다. 한국 진출이다. 이 두 사이 어딘가 진실이 있긴 할 텐데 제가 박 회장이라면 저 문구에 치가 떨릴 것 같긴 하네요.
일본 다이소 상귀와의 악연이 이쯤에서만 끝났어도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야노 회장은 자기 지분을 태운 뒤에도 얄짤 없었습니다.
다이소산교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면서 일본 물류망에 문제가 생겼는데요.
워낙 매장이 많아지다 보니 상품을 보관하는 비용도 매장까지 전달하는 물류 비용도 폭발적으로 증가한 겁니다.
이때 다이소산교는 시장을 독차지하고 있는 사업자답게 아주 손쉽게 문제를 해결합니다.
바로 협력업체로 하여금 2천여 개에 이르는 매장에 직접 상품을 배달하게 한 것이죠.
비용을 떠넘기는 전형적인 갑질이었습니다. 게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넘어버리는데요.
박 회장이 물건을 수급해 오는 거래처에 직접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좋은 물건을 박 회장이 잘 골라오면 그 업체만 쏙 빼가서 중간 마진까지 가로채는 식이었죠.
아주 잘 팔리는 물건은 그렇게 빼앗아 놓고 박 회장에게는 잘 팔리지도 않는 물건을 가짓수만 늘려서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박 회장의 회사 아성은 말라갔습니다. 2006년에 이르러서는 납품해야 할 품목은 4배나 늘어난 데 비해 매출은 반토막이 났습니다.
지분까지 헌납했던 박 회장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묵묵히 견디는 일뿐이었죠. 그때 한국 다이소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지 않았다면 박 회장은 버텨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한창 힘들던 2006년 당시는 한국의 첫 번째 매장을 개장한 지 꼭 10년이 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이소의 매출이 얼마였게요? 1천억 원이었습니다.
다이소 물건의 평균값을 2천 원으로 잡는다고 치면 물건을 5천만 개나 판매한 거였죠.
그리고 이 폭발적인 성장세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집니다.
2년 만에 2배, 또다시 2년 만에 2배가 되고요.
2014년엔 1조 원마저 넘어서더니 2023년엔 그 대단한 스타벅스 코리아마저 실패한 3조 클럽 가입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박 정 부회장은 드디어 일본과의 오랜 악연을 털어냅니다.
다이소 상교가 갖고 있던 회사의 지분 34.21%를 전부 되사온 겁니다.
인수 금액은 5천억 원, 야노에게 받았던 5억 엔의 약 100배였습니다.
여전히 아성다이소가 다이소산교에 물건을 납품하긴 하지만 이제 한국 다이소는 100% 대한민국의 회사입니다.
중국 시장에서는 하스코라는 브랜드로 일본의 다이소와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고요.
요즘엔 오히려 일본 다이소산교에서 다이소의 노하우를 배우러 한국을 찾아온다고도 하네요.
그런데 도대체 3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에 한국의 다이소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인플레이션에 있습니다.
2001년 강남의 은마 아파트가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2억 원대 중반이었습니다. 지금은 24억 원이고요.
4천 원이었던 삼겹살은 1만 4천 원이 됐고 전기요금마저 4배나 훌쩍 뛰었습니다.
하지만 다이소의 수많은 상품은 30년 전 가격 그대로죠.
면봉 묶음, 천원, 종이컵, 천원, 물병도 천원.
다이토가 인플레이션을 피해갈 수 있었던 건 야노 회장 못지않은 박정부 회장의 집념 때문이었습니다.
박 정 부회장은 자신의 저서 천원을 경영하라 해서 다이소를 구매대행업자라고 표현하는데요.
고객의 만족을 위해서 고객이 좋아할 만한 제품을 대신 구해오는 사업자라는 의미죠.
고객이 가장 좋아하는 게 뭡니까? 싸고 좋은 물건이죠.
그럼 이걸 어떻게 찾냐고요? 가장 큰 비결은 뭐니뭐니 해도 다이소의 엄청난 상품 소싱 능력에 있습니다.
다이소는 전 세계 36개 나라의 1500여 업체로부터 물건을 들여오는데요.
최고의 품질을 가장 낮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는 나라를 찾아 박 회장은 지금도 한 해에 20번씩은 해외 출장을 떠난다고 합니다.
협력업체가 기존에 팔던 가격을 엄청 낮춰버리기도 하는데요.
일방적인 갑질로 하는 건 아니고요. 방법은 이렇습니다.
일단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엄청나게 많이 주문합니다.
기본 단위가 100만이죠. 이렇게 많은 양을 한꺼번에 주문하면 이점이 많습니다.
원재료도 왕창 주문할 테니 협상을 통해 싸게 들여올 수 있고요.
생산 공장도 쉬지 않고 돌아가니 낭비가 줄어듭니다.
또 엄청난 물량을 소화하다 보니 현장에서는 급속도로 생산 노하우가 쌓이겠죠.
이건 다시 원가 절감으로 이어지고요. 다이소는 협력업체의 공장을 직접 찾아가 원가를 낮출 방법을 함께 찾기도 합니다.
재밌는 일화도 있는데요. 때는 일본에 물건을 납품하던 사업 초창기 일본의 유리 제품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지만 값이 너무 비쌌습니다.
박정부 회장은 적당한 가격에 품질까지 괜찮은 유리컵을 납품하면 시장에서 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유리공장을 찾아다니죠. 그러나 공장 책임자는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박 회장이 요구한 단가는 너무 낮았거든요. 하지만 박 회장은 여러 차례 공장장을 찾아가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죠.
그러면서 해법까지 제안합니다. 유리로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원래 이렇습니다.
먼저 유리 재료를 뜨거운 용광로에 넣고 녹입니다.
그러면 유리 물이 되어서 흘러나오는데요. 이 유리 물을 틀에 넣고 식히면 제품이 됩니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 다 만들고 나면 남은 유리물은 버리고 용광로를 청소했죠.
그런데 박 회장은 아예 100만 개, 200만 개를 주문해서 24시간 동안 공장을 계속 돌리면 뒷단계를 아예 없애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용광로를 청소할 필요는 없겠죠.
게다가 계속 생산을 하는데 버릴 유리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박 회장의 잇따른 설득에 결국 공장장은 한번 해보기로 하는데요.
300만 개에 이르는 첫 주문을 소화하고 보니 결국 박 회장이 장담한 그대로였습니다.
다이소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광고도 잘 안 하고요.
물건을 포장하는 패키지도 최소화합니다. 어차피 진열하면 한쪽만 보인다고 포장의 한쪽 면에만 무늬를 넣기도 하죠.
아예 상품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떼어버리기도 합니다.
고객이 만족할 만한 가격을 먼저 설정해 두고 그 값에 맞추기 위해 모든 수를 동원하는 거죠.
다이소의 비용에 대한 집착은 점포를 개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이소에는 특이하게도 복층형 매장이 많은데요.
고속버스터미널에 있는 다이소 많이들 가보셨을 텐데요.
1층에는 입구만 있고 지하에 넓은 매장이 있잖아요.
임대료가 비싼 1층에서는 최소한의 공간만 빌려서 손님들을 모으고 본격적인 장사는 임대료가 싼 2층이나 지하에서 하는 시스템입니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1층의 장점은 챙기면서 비용은 확 떨어뜨리는 전략적인 선택이죠.
다이소를 창업한 박 정 부회장은 올해 80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다이소를 경영하고 있죠. 1년에 3조 원어치나 되는 물건을 파는 지금도 그에게는 아직 꿈이 남아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그동안 개발했던 모든 상품을 모아놓은 초대형 다이소몰.
모든 가족이 레저를 하듯 쇼핑을 즐기는 복합 쇼핑몰입니다.
머지 않은 미래에 스타필드처럼 거대한 다이소를 볼 수 있게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