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함 보다 쓰러지지 않는 강인함으로 선행을 실천하는기업 오뚜기
혹시 어떤 유명 재벌 회장이 후계자한테 평생 딱 한 번만 눈물을 보였다고 하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그러면 혹시 전쟁이 났는데 최고 명문고등학교 다니던 부잣집 아들이 자원을 해서 참전했다는 얘기를 들어봤어요.
이게 다 오늘 주제인 이 기업 창업주 얘기인데 이런 사연은 금방 다시 말씀을 드릴게요.
그러면 혹시 이 회사가 어딘지 짐작이 가 50년 넘게 이익을 내지 않은 해가 없고 지속적으로 성장해왔고 최대 실적을 경신했고 거액의 상속세를 제대로 냈고 배당도 꾸준히 하고 기간제 근로자가 거의 없고 티 안 내는 사회공헌으로도 유명한 그리고 이 회사가 치료해 준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환자가 5천 명이 넘죠.
직원은 3천 명 정도니까 직원보다 많은 생명을 살렸다고 할 수 있어.
근데 이 회사가 어디일까라고 묻는 건 너무 쉬운 문제죠.
왜냐하면 이런 데가 없으니까
사실 이 기업 얘기는 너무 유명하니까요. 오늘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이 기업의 창업주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그동안 소비더머니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얘기를 전하려고 해요.
이번 주제는 칼의 케찬, 마이오네지드 라면, 당면 국수, 참기름, 식용유, 밥 그리고 즉석식품 등등 수많은 식품을 오랜 세월 동안 만들고 팔면서 고객의 사랑을 받아온 기업 오뚜기와 함태호 창업주 이야기입니다.
지난 2016년 하늘의 부름을 받은 오뚜기 창업주 고 함태호 명예회장 저는 이분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기를 선택했고 또 그 삶을 통해서 굉장히 많은 일을 이루었지만 그걸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쓴 분이었다고 생각해요.
근데 어떤 다른 선택을 했고 뭐가 남달랐느냐 일단 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해서 부잣집 아들로 자랐는데 과거 최고의 명문이 경기고등학교를 다닐 때 북한의 남침으로 625가 발발하니까 18살의 함태호 학생이 스스로 입대하기로 결심했다고 하죠.
전쟁이 났는데 부잣집 아들이 막 좋은 학교 다니고 공부도 잘하고 하는데 그냥 아버님 저 입대하겠습니다.
스스로 당시에 다들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입대를 피하는 상황이었고 왜냐하면 전쟁 나가서 태반이 죽으니까
함 회장의 아버님 역시 반대했을 거 아니에요 그 아버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원입대를 한 거죠.
아버님 나라가 있어야 기업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라면서요.
그리고 그렇게 입대해서 7년 가까이 군 생활을 하고 대학 갈 시기를 놓쳐버린 거 아니 그러니까 전역해서 뒤늦게 대학에서 공부하고 졸업해서는 아버지 사업을 돕기 시작한 또 뭐가 달랐느냐 아버지 사업을 도우면서 오직 식품 더 좋은 식품을 만드는 게 함 회장의 유일한 관심사가 됐다고 하거든.
왜냐하면 아버지 회사의 본업은 화학 제품 만드는 거였는데 페인트 세제 원료 같은 거.
그러다가 이 회사가 보수적으로 식품 첨가물 등을 화학회사니까 만들게 됐어요.
그런데 아버지를 돕던 이 아들이 식품 사업에 꽂힌 거죠.
그리고 고심하다가 스스로 개발을 주도한 게 바로 오뚜기표 즉석 카레.
그런데요 통상적인 소위 부잣집 아들들은 어땠겠어요?
아버지가 사업을 해 그러면 장남이야 어떻게 생각했을
보통의 경우에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게 대부분이잖아요.
근데 이 함태호 창업주가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게 뻔한데 그걸 거부하고 독립해서 스스로 기업을 이루기로 결심을 하죠.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니었고 형제들도 많았어. 그리고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냐면 결혼할 때 받은 추기금에다가 아버지께 빌린 돈을 보태서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거 봐 아버지가 도와주셨겠네 하는데 그 빌린 돈은 이자까지 붙여서 갚아 나갔고요.
아무튼 그렇게 자기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회사가 바로 풍림상사였죠.
풍요로운 숲 풍림 작은 나무를 오랜 세월 보살펴서 큰 숲을 이루겠다.
아무튼 다시 카레 얘기로 돌아가서 카레라는 게 6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사실 잘 안 먹는 식품이었죠.
물론 인도에서 영국으로 또 영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되고 그게 한국까지 전해지면서 일제 강점기부터 칼에 파는 곳들은 있었고요.
또 작은 규모지만 수입 칼에 취급하는 것도 있었고 또 옷두기 이전에도 칼에 파는 업체 역시 있었지만 이게 흔히 먹는 음식이 아닌 외국의 이색적인 음식 비슷했던 거죠.
그래서 그때 신문 광고를 보면 그런 느낌이 나요. 사파도 막 외국인이고 그런데 왜 함 회장은 남들과 달리 자기 사업의 첫 아이템으로 생소했던 카레를 선택했을 라면은 일본 업체와 기술 제휴에서 성공한 업체들이 이미 한국에 있는 상태였고요.
한국 사회에 많은 것들이 앞서서 발전한 일본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라면에 이어서 카레를 떠올렸을 테고요.
그러니까 라면도 일본에서 성공했고 카레도 일본에서 성공했으니까
라면을 들여왔으니까 카레도 이렇게 들여오면 잘 되지 않겠냐 뭐 이런 생각을 했겠죠.
그리고 또 밥이 주식이니까 카레가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을 거고 조리가 또 간편하고 그리고 또 오뚜기가 카레를 처음 출시한 게 봄이었거든요.
봄에 출시하니까 곧 다가올 여름이 있잖아요. 이 더위에 당시에는 냉장고 있는 집을 찾아보기가 되게 어려울 때니까 이 분말 카레 보관하기에도 좋고 간편하게 조리하기에도 좋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르는 생소한 식품이잖아요.
전 직원이 동원돼서 영업에 몰두하 머리 쓰고 땀 흘리자 이런 생활 신조를 내건 회사답게 창업자부터 직원들까지 전부 다 카레 박스를 들고 막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땀 뻘뻘 흘리고 막 하면서 영업을 했대요.
근데 직원들한테만 시킨 게 아니라 창업주이자 당시 사장이었던 고 함태호 명예회장도 영업을 같이 하는 거죠.
그리고 후발주자인데도 과감하게 tv 광고에다 돈을 쓰면서 제품을 알리죠.
그렇게 애를 쓰니까 금세 카레가 팔리기 시작하고요.
이제 날씨가 또 추워지는 거 아니에요? 여름이 지나가니까 이런 상황이니까 카레 말고 또 팔 게 필요한데 그때 겨울을 대비해서 내놓은 게 바로 즉석 스프였죠.
옛날에 왜 이렇게 돈가스집 가면 이렇게 내주는 거 왜 당시에 쌀이 모자라서 정부가 분식을 장려할 때 그러니까 빵 막 먹으라고 할 땐데 사람들이 빵이 익숙하지 않은데 스프 이렇게 찍어 먹기도 좋고 같이 먹기도 좋고 하지만 사람들이 역시 카레는 물론이고 스프도 잘 모를 때니까 이 스프를 어디든 가서 직원들을 보내서 시식 행사를 열고 맛보게 하고 그리고 당시에 도매상에 의존하지 않고 백화점이든 슈퍼든 동네 작은 구멍가게든 어디든 거래처 소매상이면 어디든 가서 제품을 설명하고 진열까지 막 도와주게 하고 갑자기 사장님 저희 카레 좀 한번 들여놔 주시겠어요?
카레가 뭔데 스프가 뭔데 그랬을 거예요 지금이야 뭐 카레든 스프든 사실 되게 흔하고 값싼 음식으로 여겨지지만
60년대 말 70년대 초만 해도요. 먹을 게 부족하니까 누군가가 영양가 높은 식품을 낮은 가격에 내놓으면 그 자체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풍림식품은 당시에 가능한 제일 좋은 원료를 쓰고 최대한 가격은 낮게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오뚜기의 철학이 되는 사실을 마련했다고 보다 좋은 품질 보다 높은 영양 보다 앞선 식품으로 식생활 향상에 이바지한다.
그리고 영양과 가격도 중요하지만 사실 먹는 게 맛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함태호 회장은 그때부터 훗날까지 무조건 제품 개발하고 시제품이 나오면 직접 조리를 해서 직원들이랑 같이 먹어봤대.
그냥 해오는 거 먹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조리를 해서 왜냐하면 그래야 느낄 수 있잖아.
이게 불편하고 이 포장을 이렇게 바꾸고 맛을 어떻게 그리고 직원들이랑만 먹었느냐 아니면 혼자 먹었느냐 그게 아니라요.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좋은 원료로 만든 거니까 가족들한테도 만들어주고
어린 아들 딸뿐만 아니라 나중에 손자 손녀한테도 라면 직접 끓여주고 며느리한테도 끓여주고, 그리고 함태호 창업주의 오뚜기는 카레와 스프에 이어서 또다시 역시 남들과 다른 품질로 만들기로 하죠.
해외에서는 많이 먹지만 한국에서는 고가의 수입 상품뿐이라서 이른바 부자들만 먹는 그나마 국산이 나와도 불량품이 대부분인 식품들로 점차 영역을 넓혀갑니다.
그렇게 다음 주자가 70년대 초반에 연이어 출시한 케첩과 마요네즈 오뚜기는 마요네이라고 안 쓰고 마요네스 수입 상품을 대체할 수 있는 식품을 제대로 만들어서 보통 사람들의 영양 수준과 식문화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그때는 왜 시중에 케찹이랑 마요네즈가 거의 다 수입 상품이었어요.
사람들이 잘 안 먹고 그래서 막 이런 수입 상품 사 먹으면서 외화 낭비한다 막 이렇게 비판하는 얘기들도 꽤 있었죠.
아니 그러면 국내 업체들이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국내 업체들은 그때 뭘 하고 있었느냐 불량 케첩 마요네즈를 만들다가 막 잡혀가던 시절이에요.
심지어 당시에 국내 업체가 만들던 케첩이라는 게 어땠냐면 케첩이라고 하는데 토마토가 전혀 안 들어가 그리고 밀가루로 풀을 써가지고 거기다가 빨간 색소랑 식초 등등을 넣고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사실은 토마토 케첩이 아닌 거지 뭐 이런 상황인데 오뚜기가 카레에 이어서 마요네즈 캐첩까지 좋은 재료를 쓰고 외국에서 기술을 배워와서 과감하게 투자한 최신 설비로 제대로 국산 제품을 출시했던 그리고 케찹이랑 마요네스 같은 경우는 지금도 그렇지만 큰 기업들이 외국 회사랑 제휴해서 막 시장에 뛰어들었는데 생각해 보면 지금도 왜 글로벌 대기업들의 해체 바이즈 별로 안 먹는 데가 한국밖에 없잖아요.
거의 당시에도 상대보다 덩치가 훨씬 작은 오뚜기가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시장을 쭉 주도하고 있죠.
그리고 좋은 제품을 잘 만들기만 한다고 팔리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얼마나 영업에 열심히 하냐
영업사원들은 어느 소매점이든 가서 설명하고 제품 진열 도와주고 채식 제품 나눠주고 먹여주고 당시에 함태호 사장 역시 본인의 자가용까지 영업에 쓰라고 해줬.
그리고 영업사원들이 다 일 나갔다가 복귀할 때까지 퇴근 안 하고 지켜보고 그러니까 어때요?
제일 늦게 퇴근하는 게 사장님이었던 거죠. 그리고 1973년 아예 상품에다 붙여 팔던 상표 오뚜기로 회사 이름을 바꿉니다.
이렇게 카레 스프, 무엇보다 케찬 마요넷으로 수입 상품을 대체하고 또 대기업의 추격까지 따돌리면서 오뚜기는 본격적으로 성장합니다.
이후에도 후추, 식초, 유, 기름이요 참기름, 식용유 이런 것들 또 레토르트 식품, 삼분카레 짜장 같은 거 있잖아요.
또 온갖 종류의 면 김 등등 식품 전반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꾸준하게 이익을 냈죠.
그리고 사람들이 외식을 하기 시작하고 식당들이 늘면서 이런 다양한 오뚜기의 라인업은 일반 가정뿐만 아니라 식당에서도 힘을 발휘합니다.
왜 덕용 제품이라고 하는 업소용 상품에서 오뚜기의 장악력이 어마어마하거든요.
작은 소매점까지 빈틈없이 커버하는 영업력에다가 가성비에 늘 신경을 쓰고 또 업소용 제품도 제대로 만들자는 원칙이 힘을 발휘했다 이런 평가가 많아요.
왜 당시에는 그랬대? 일부 업체들이 업소용이 용량이 많은데 가격이 싸니까 들어가는 함량 같은 걸 낮추는데 그래서 그걸 직원이 건의했나 봐 사장님 우리도 이거 약간 이렇게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했더니 막 혼났대.
그런 거 절대 따라하지 말라고 당 그러니까 이걸 살 수밖에 없는 거죠.
가격도 합리적이고 그리고 드디어 1987년 청보 식품을 인수하면서 오뚜기 라면이 탄생하 그러니까 기존 분야에서 선두 자리를 지키는 데만 안주한 게 아니라 더 큰 시장이었던 라면 시장에 도전한 거죠.
오뚜기에서 맛있게 만들었습니다. 근데 당시 라면 시장에는 이미 농심과 삼양식품, 지금의 팔도 빙그레까지 앞서 나간 업체들이 많았고요.
또 이 업체들이 덩치가 다 오뚜기보다 훨씬 컸고,
게다가 인수한 청보식품이라는 회사가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함 회장의 오뚜기는 왜 이런 시장에 도전하는 남다른 선택을 했던 걸까?
일단 오뚜기한테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라면 사업은 우리가 안 해봤지만 라면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재료들 우리에게는 다양한 라인업을 만들면서 갖춘 제품 개발력 그리고 강력한 영업력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기존 업체의 생산 라인과 경험이 더해지면 해볼 만할 거다.
그리고 또 오뚜기가 1위를 하는 분야들을 대기업들이 케찬 마요네즈 같은 거 호시탐탐 노리는데 새 사업을 안 하면 언젠가는 이게 막 위태롭겠다 이런 생각도 있었겠어.
그럴 때 그냥 지키고 웅크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식품은 우리가 잘하니까 오히려 더 큰 시장에 도전해보자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판단이 어떤 결과를 내놨는지는 여러분이 잘 아시죠?
진라면, 스냉면 같은 히트 상품을 내놓으면서 우뚝이는 라면 사업에 뛰어든 지 5년도 안 돼서 업계 3위 자리까지 치고 올라갔고요.
10년여 만에 2위 자리를 위협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오뚜기가 진출한 이후에 라면 시장 규모가 4천억 사이즈였는데 처음에는 10년 정도 만에 1조 원 규모를 돌파하고 2013년에는 2조 원 이상으로 커졌어요.
라면 시장 자체가 고성장하면서 커질 때 여기에 뛰어든 판단이 옳았던 거죠.
반면에 대기업들이 노렸던 오뚜기가 1등 하던 케찬 마요네즈 같은 시장은 어땠을까 라면만큼 커지지 않았죠.
그러니까 오뚜기가 라면 마케팅을 특히 공격적으로 한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던 거지 막 류현진 선수 나오고 막 짬뽕 무슨 불맛에 짬뽕 맛있지 게다가 이제는 라면이 해외 수출 규모까지 급증했잖아요.
그때 만약에 오뚜기가 라면을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렇죠 최고경영자의 판단이 이렇게 중요한 거죠.
오뚜기 진라면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함태호 창업주는 묵묵하게 사업을 키우는 동시에 남들 모르게 사회공헌 활동을 계속해서 왜 고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윤이 적다는 식품업계에서 생길 수 있는 사내외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요.
게다가 영업으로 유명한 업체 영업 강하게 하다가 또 부작용들이 발생할 수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뚜기가 평판을 유지할 수 있는 건요.
기본을 지키는 품질, 국민 대다수를 위한 가격 정책을 선택하면서 성과를 내고 동시에 소위 오너가 사회를 생각하는 인물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느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오뚜기를 키운 함태호 창업주는 2009년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최고경영자는 직원과 직원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이제 나는 이러한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고 이 시간 이후부터는 여러분의 책임과 의무다.
왜 첫 부분에 그 말씀드렸잖아요. 어떤 재벌 회장이 후계자에게 딱 한 번 눈물을 보였다는 얘기
2016년에 함태호 창업주가 영면에 들기 한 주 전쯤 후계자 함영준 회장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서 평생 처음 눈물을 보였다고 해요.
나는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 마음껏 일했는데 너한테는 양해도 구하지 않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부담을 지게 해서 미안하다고 지난해 사상 최고 실적을 낸 오뚜기인데요.
어떤 기업 또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들에게는 계속해서 과제가 있고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거죠.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잘 팔면서 과거와 현재의 성과를 이어가는 것, 평판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이걸 통해서 성장하고 구성원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 절대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처럼요.
오뚜기가 과거와 현재처럼 앞으로도 그런 기업의 모습을 계속 보여줄 수 있을지 함께 지켜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