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삼성 이재용 회장이 한 장례식장에 조문을 하러 나타났는데 놀라운 추모의 말을 합니다.
"이런 비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스티브 잡스가 it 업계의
끼친 영향이나 공헌도보다도 박 부장님께서 우리나라 산업과 사회에 남겨주신 좋은 의상과
장벽이 몇 배 더 크시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 우리 지금 이런 발전된 경제 같이 우리 사회도 불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니 삼성 회장이 이 정도로 칭송하는 인물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이 인물이 일으킨 기업은 어떤 곳이길래 이들이 없었으면 지금과 같이 발전한 한국 경제도 없었을 거라는 얘기가 나올까? 좀 과장된 거 아니야 싶을 수도 있는데 사실 진영을 떠나서 많은 이들이 똑같은 얘기를 해왔죠.
아넬 같은 생필품에서부터 기계 건설 조선, 자동차, 전자 등등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군 한국 경제를 일으킨 여러 기업이 성장할 때 그 바탕이 돼준 철 그리고 다들 안 된다고 하던 돈도 경험 있는 사람도 없던 시절에 맨 땅에서 그 철을 만든 제철소를 일군 신화와 같은 이야기가 바로 여기서 출발했으니까요.
수많은 사람이 이제 한국에서 이런 성공이 다시 있기는 쉽지 않다.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하고요. 이제는 옛날과 세상이 달라졌다.
한 두 사람이 애를 쓴다고 바뀌는 게 뭐 얼마나 있겠냐고 하지만요 그래서 오히려 준비해 봤습니다.
이번 주제는요 불가능에서 시작해 세계 최고 경쟁력의 철강 기업이 된 포스코 그리고 포스코를 일군 고 박태준 회장입니다.
다들 불가능하다는데 맨 땅에서 포스코 같은 세계적인 기업을 읽었어.
그러면 이 회사를 일으킨 사람은 재산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면 회사 지분은 몇 퍼센트나 가졌을
게다가 군사정권 시절이었으니까 적어도 뭐 수천억 아니면 뭐 재벌이 됐을까? 오늘 포스코피는요 인생을 바쳐서 포스코를 세웠지만 정작 회사 주식은 한 주도 갖지 않았던 거인 청암 박태준의 이야기와 함께 시작합니다.
일제강점기 시골 마을에서 자란 6살 소년이 생계를 위해서 고국을 떠나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일본 사람한테 이길 수 있는 게 뭐가 있니?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부모님의 말씀대로 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죠.
공부에서도 운동에서도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몰아넣을 땐데 이공기한테는 징병 연기를 할 수 있게 해.
그래서 잠을 줄이면서까지 공부해서 명문 아세다 대학교 공대 합격.
그런데 곧이어 일제가 패망하고요. 우리에겐 광복이 찾아오죠.
대학생이 된 박태주는 일본에 머물지 않고 부품 마음으로
조국에 돌아오죠.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고향 땅에 내 역할이 있을 거야.
그런데 돌아온 고향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어요.
수많은 공장이 있고 소위 근대화된 일본과 달리 공장이 뭐야 전깃불도 안 들어오고 상수도도.
그래서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 올라갔더니 이번에는 대학은 물론이고 온 사회가 이념 갈등에 사로잡혀 있고 근데 또 정치판에 뛰어들기는 싫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해도 일자리도 없고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가니까 결심을 하죠.
그래 내가 원하는 기계공학 엔지니어의 길을 갈 수 없다고.
계속 이렇게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지.
그리고 미군정이 단기간에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서 만든 사관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관생도 시절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을 인연을 만나죠.
탄도학 시간이었어요. 탄도 궤적 계산하는 문제를 두고 교관이 풀어볼 사람을 찾는 거예요.
이 분위기가 어떤 건지 아마 아실 거예요.
수학 시간에 왜? 선생님이 어려운 문제를 딱 내놓고
칠판에 적어놓죠 그리고 풀어볼 사람 이렇게 하면 어때요? 눈을 안 마주치려고 다 고개 내리고 있고 딴 데 보고 있고 막 그러잖아요.
그런데 박태준 생도는 일본에서 대학 입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치렀던 사람이잖아요.
특히 수학이나 과학이 잘했다고 하고요.
다들 엄두도 못 내던 문제를 박태준 생도가 술술 풀어냅니다.
당연히 이 교관은 특히 강한 인상을 받았겠죠.
물론 생도로서도 교관을 기억했을 그랬는데 시간이 흘러서 박태준이 임관을 하고 6.25가 발발하고요 전쟁이 끝나고 육군 대학에 들어가서 수석 졸업하고
육군 사관학교에 부임하고 결혼을 하고 국방부 인사과장이라는 요직에 있던 시절에 10년 전에 그 교관이 박태준을 찾아옵니다.
바로 박정희 소장이었어요. 나랑 같이 일해보지 않겠 박태주는 요직을 떠납니다.
그리고 윗선에서 지휘관이 되죠. 그런데 이렇게 누구를 따르든 어느 자리에 가든 이전에도 이후에도 박태준 일생을 관통하는 태도는 변치 않았.
국방부에서 인사 업무하던 시절에 온갖 청탁이 들어오는데도 그걸 물리쳤듯이 일선 지휘관이 돼서도 똑같았.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부임을 해서 첫 번째 업무가 김장을 막 대량으로 해야 되는데 김장을 하는 현장에 갔는데 매운 냄새가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상하게 여기고 양동이에다 물 부어봐 해서 고춧가루를 거기다 넣었는데 톱밥 같은 게 막 건져지는 거예요.
그래서 당장 담당자를 불러가지고 이런 걸 병사들한테 줘 넌 반역자
쫓아내버리고.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요 고춧가루 납품 업자까지 불러들입니다.
그래서 혼을 내는데 혼내니까 이 업자가 쫓겨나듯이 가다가 다시 와가지고 뭘 했느냐 두툼한 봉투를 건네는 거예요.
그렇게 봉투를 주니까 어땠을까 영화에서 나오듯이 진작 말씀하시지 같은 식구 아닙니까 이런 거 뭔지 알지? 그렇게 나왔느냐 아닙니다.
권총을 꺼내가지고 당장 쏴버리기 전에
썩어지라고 하고요. 그런데 이 업자가 혼자 했겠어요 이런 업자들이랑 연결돼 있는 윗선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윗선에서 봐주라고 막 압력이 들어오는 거 이렇게 압력이 들어오니까 다시 불러가지고 다음부터는 잘라 그랬느냐 아닙니다.
직접 서울로 올라가 가지고 고춧가루를 사러 가죠.
그런데 훗날 제철소를 지을 때도 그랬거든요.
부실공사 정황이 보이니까 다이나마이트로 아예 폭파시킬 정도로요.
그런데 왜 매사에 이렇게까지 했을까 기록에 따라서 좀 다른데요.
어떤 사람은 박태준이 생도 시절에 그랬다고 하 또 어떤 사람은 6, 25가 끝나고 나서 그가 결심하고 좌우명을 정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박태준이 왜 이렇게 살았는지가 느껴지는 좌우명이죠.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의 절대 절망은 없 다른 나라보다 훨씬 늦게 가난하게 시작한 한국이 발전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이 땅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거겠죠.
다시 돌아가서 아무튼 그렇게 요직을 버리고 한직에 가더라도 줄곧 생도 시절의 교관과 군에서 같이 움직였는데요.
4, 19에 이어서 516이 일어나고 그렇게 따르던 교관이 최고 권력자가 되죠.
그러자 정치를 잘 모른다면서 사양하는 박태준한테 최고 권력자가 비서실장 자리를 맡겼는데 이번에는 또 스스로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나고요.
저는 정치 잘 모릅니다. 계속 이렇게 나오는 거
그리고 나서 경제 분야 자리를 맡아서 기업인들 경제학과 교수들 만나서 실물과 이론을 배우고 또 통상사절단으로 선진국을 방문하고 그러다가 다시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는지 이번에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합니다.
아니 성공이 보장돼 있는 요직을 계속 준다고 하는데 그걸 다 물리치고 공부하겠다는 장관 자리 준다 국회의원 공천 준다 군으로 가면 중요한 자리가 당연한데도 모두 다 사양하고요.
그런데도 박태준한테는 계속 중요한 업무가 맡겨지죠.
그리고 한국이 제1차 경제개발 5년 계획을 세우면서 큰 책임이 맡겨지.
가장 큰 수출 품목이었던 텅스텐을 생산하던 대한중석 적자투성이 기업을 맡아서 살려보라.
그리고 박태준이 사장으로 부임한 뒤에 실제로 대한중석은 금세 흑자로 돌아서죠.
그때는 주요 수출품이 뭐 지하자원 수산물 이러던 시절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대안 중석을 흑자로 돌려놓은 뒤에 대통령으로부터 비밀리에 특명을 받습니다.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산업의 쌀 철이 필요하다. 자네가 종합제철소 건설을 맡아봤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어땠냐면 일제 강점기에 제철 쏟아온 제철소는 답 북쪽에 있었죠.
그리고 분단되고 나서 한국에 남은 건 사실상 별로 없었고 그래서 건국 초기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제철소를 만들려고 애를 썼는데 60년대 중반까지는 일이 전혀 안 풀리는 상황이었어요.
워낙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돈은 물론이고 기술자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고철을 녹여가지고 필요한 거를 만들어봤자 철 생산량이 어땠냐면 일본의 200분의 1, 북한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 미국 같은 데는 따라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득하게 멀리 있고 뭐 이런 상황이니까 도로를 깔려고 해도 항만을 만들려고 해도 공장을 지으려고 해도 철이 필요한데 다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인 거죠.
돈이 없으니까 그걸 제대로 할 수가 없.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급기야 정부가 주도해서요.
미국 유럽에 읍소해가지고 그 나라 기업들이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이라는 걸 만들고 이들에게 돈을 빌려서 종합제철소를 만들려고 하는데 이게 시간이 1년, 2년, 3년 계속 흘러도 일이 거듭해서 안 풀립니다.
선진국 업체들도 그렇고 국제기구도 그렇고 자꾸 조건을 덧붙이는 거죠.
아니 우리는 급해 죽겠는데 뭐 사업성이 있는지 검토를 해보자.
만약에 제철소가 지어진다고 해도 가동은 선진국 업체들이 맡아요.
제철소 지을 돈은 빌려줄게. 근데 짓는 것도 그렇고 가동도 니네가 하면 안 돼 뭐 이런 식이죠.
그걸 왜 지어야 돼 근데 이게 지어봤자 결국은 남 좋은 일만 시킬 수도 있.
근데 그렇게 까다롭게 조건을 달고 나서도 세관을 또 바로 내주는 것도 아니었죠.
산업이 발전할수록 철강 수요는 급격하게 커지고 있는데 우리는 경제를 발전시켜서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시간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던 시절에 은밀하게 특명을 받았던 박태준은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일본에 있던 인맥을 활용해서
패전 뒤에 제철소를 만들어서 성공시킨 사람들을 만나고요.
차관을 내주겠다던 미국과 유럽 업체들이 타당성 조사를 하고 있는데 동시에 일본 업체들한테도 조사를 맡기다.
왜 그랬을까요? 한쪽 말만 듣고 덤터기를 쓰면 안 되니까요.
미국이랑 유럽 업체들이 하는 걸 보니까 차관을 내줄지도 모르겠고 설령 돈을 내준다고 해도 그쪽에서는 한국 그냥 적당한 규모로 만들어 하는 식이었으니까요.
우리 기계 가져다가 좋은 기계도 아니야.
거기에 적당히 짜맞춰가지고 맞추면 니네도 좋 우리도 좋고 하잖아.
그리고 이뿐만이 아니었어요. 우리 정부 인사의 요청으로 고국에다가 제철소 짓는 일과 관련해서 조사를 하고 있던 롯데 신격호 창업 당시에 일본에서 거부가 된 상황이었으니까 돈 없는 우리 정부 쪽에서 부탁을 한 거였죠.
신 회장님 제철소를 한번 해보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 건데 박태준이 이런 신 회장을 만나서 롯데 측에서 조사한 자료를 넘겨받았던 만약에 이때 신격호 회장이 일을 계속해가지고 제철소 짓는 일을 맡았다면요 포항제철이 아니라 지금 롯데 제철이 됐겠죠 포스코가 아니라 로스코 이렇게 됐을 수도 있어요.
아무튼 밀명을 받고 물밑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박테
당시 대한종석 사장은 1967년 드디어 공식적으로 종합제철소 건설추진위원장에 내정되면서 수면 위로 등장합니다.
곧이어 포항에서 종합제철 기공식이 열리고 이듬해였던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가 창립하죠.
60년, 68년에
제자들 만나고 그러니까 미친 놈들이 집단이라고 말을 듣고 이렇게 해 왔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건요 포항제철이 국영기업이 아니라 상법상의 주식회사, 민간 기업 형태로 만들어줬던 거예요.
물론 정부 지분은 많았지만 이게 왜 그랬을까? 일단 박태준 사장은 군 시절부터 보니까 중요해서 자원이 많이 들어가는 일일수록 손이 센 사람들로부터 각종 청탁이 엄청나게 들어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공무원들 입김도 많고 실제로 제철소 입지를 포항으로 정할 때도요 권력자들이 자기 고향에다가 짓게 하려고 난리였으니까
이 제철소 건설이라는 게 맨 땅에다가 초집중해서 전력을 다해도 어려운 일인데 정치적인 외풍의 관료들 입김에 이걸 직격탄으로 맞으면 그렇게 해서는 일이 안 된다 싶었던 거겠죠.
그리고 일본에서도 제철소를 처음 세우면 수십 년 동안 적자가 나지 않았냐 버틸 수 있겠냐 구경으로 그냥 가자 이렇게 걱정하는 대통령한테도 그랬다고 하죠.
민영으로 가야 초기 멤버들한테 책임감이 더 생길 겁니다.
왜냐하면 국경 기업이 아니라 민영회사에서 실패했으면 갈 데가 더 없어질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우리가 지금은 제철소도 없는 상황이지만 이걸 꼭 성공시켜서 언젠가는 수출도 해야 하지 않겠 그러려면 국경으로는 안 됩니다.
다른 나라에서 딴 짓을 할 겁니다. 오케이 반드시 성공시키기.
그리고 대통령에게 했던 말처럼 포항제철 창립식에서 박태주는 이렇게 얘기하죠.
우리는 생명 거는 거다. 만약 이게 성공하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이건 뭐 무슨 죽는다 뭐 어떻게 한다 해가지고 국민들한테 속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시키고야 말아야 한다 하나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했죠.
그리고 창립사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이 데려온 창립 멤버들한테는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하죠.
최저 비용으로 최고의 회사를 만들고 부패를 근절한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우열의 차이가 없는데 우리가 종합제철을 잘해서 민족의 자존심도 세우고 우리도 일본처럼 한번 잘 살아보자 밥만 먹다가 죽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각오와 달리요 포항제철이 지닌 건 거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죠.
사실상 아무런 인프라가 없는 영일만 근처에 드넓은 모래사장에다가 나무로 지은 60평짜리 현장 사무소가 전부였어요.
현장사무소 이름을 롬멜하우스라고 여태 이런 상황이고 제철소 건설 차관도 아직 안 들어왔는데 박태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중은행장을 찾아서 대출을 받아와요.
그리고 뭘 했느냐 의회의 지시를 먼저 합니다.
인재를 모으려면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하원 주택을 짓 그리고 학교도 짓고 주거 환경을 바꿔 나간다.
이러니까 어떤 반응이 나왔느냐
정치권 언론 할 것 없이 난리를 치죠.
제철소 짓겠다면서 집부터 짓고 앉아 있네 라 저 땅 투기하러 갔나 등등.
근데 이런 여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외국에서 제철소 지을 차관을 안 주고 있던 거 한국은 제철소를 지어봤자 경제성이 없다면서 오죽했으면 건설 현장을 찾은 대통령마저요 허허벌판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고 하죠.
이거 남의 집 다 털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 그 옆에서 듣는 마음이 얼마나 그랬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 박태준의 꿈은 머리와 가슴 속에서 현실의 사진 영상과 같이 시각화가 돼 있었던 걸까요? 제철소도 제대로 못 짓고 있는 상황에서 직원 숙소부터 짓고 난 포항제철은요 직원들을 이번에는 해외 제철소로 연수를 보냅니다.
물론 또 당시에 박태준 사장이 특명을 내렸죠.
보고 들은 걸 머릿속에 가득 담아와서 전파하라.
다 긍정적으로 보면 좋아. 그러면 해외 차관 도입이 성사가 돼가지고 제철소를 지어서 돌릴 일만 남은 거죠 아주 긍정적으로 보면.
그런데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끝내 돈을 다 안 빌려주겠다는 뜻을 밝힌
빌려줘봤자 너는 안 된다는 거지. 그리고 중남미나 서남아 국가들처럼 적당한 미국, 유럽 기계 사가지고 적당히 돌리면 너네 지배층도 좋고 우이 좋다는데 그런 생각이 없다니까.
어디 감히 큰 꿈을 꿔 그랬던 걸까요? 근데 아까 박태준의 좌우명 중에서 무슨 말이 있었죠? 절대 절망은 없다.
그래서였는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한일 양국 정부가 농림수산업에 쓰기로 합의한 대일 청구권 자금의 무상자금을요 대철소 건설을 위해서 돌려보자.
일본 정부를 설득하기에 앞서서 일본 철강업계의 기술 지원과 협력을 약속받아보자.
이 아이디어를 대통령과 상의해서 의기투합을 한 뒤에 일본 인사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직접 날아가서요. 그리고 어떻게 됐느냐 결국 미국과 유럽 기업의 차관은 무산됐지만 박태준이 일본 철강업계의 지원 약속 받아내고 청구권 자금 전용이 가능해지면서 포항제철은 황무주에서 본격적으로 제철소를 짓기 시작하죠.
당시에 박태주는 모래벌판에 선 직원들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고 우리 농민들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에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 제철 보고 우리의 생활 신조요 인생 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이라는 게 무상자금도 있었고 유상 자금도 있었 경제협력 자금도 있어가지고 무상자금은 어디에 써야 하고 유상 자금은 어디에 써야 하고 이렇게 용처가 다 정해져 있었어요.
합의를 해서 이게 한국에서 일본을 설득하려면 일본 정부 입장에서도 아니 제철소를 짓겠다는데 기술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올 거 아니에요. 제설소들을 도와준대 누가? 일본 제강업계가 도와준답니다.
이렇게 갖고 온 거지 합의문을 그러니까 이 순서가 일본 철강회사들을 설득해서 ok를 시키고 일본 정부가 ok를 하고 합의를 해서 그 돈의 용처를 바꿔 나간 거죠.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만약에 그 돈이 처음에 정해줬던 대로 농림수산업에만 쓰였으면 나중에 경제 효과가 어떻게 차이가 났겠는가 그래
그러나 결국은 사람이 이런 어려운 거대한 일을 해내려면 반 정도는 거의 미쳤다 라고 제3자로부터 평가를 받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해내기가 어렵지 않느냐 하는 것이 제가 경험한 하나의 어떤 교훈이라고 그럴까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억불이 넘는 돈이 생겼으니까 제철소를 짓기를 시작하는데 이제 됐다라고 하는데 수많은 인사청탁, 납품 청탁이 들어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항제철은 원칙을 지키면서 제철소를 지어나갔어요.
박태준과 직원들의 피땀어린 노력 그리고 박태준에게 건의사항을 종이에 적으라고 한 다음에 그 위에다가 직접 서명을 해줘서 일종의 종이 마패를 만들어주면서까지
또 10여 차례나 건설 현장을 찾았던 최고 권력자의 지원이 합쳐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겠죠.
그리고 시간이 3년쯤 흐른 1972년 6월 8일 포항제철소 제1고로에 불이 들어갑니다.
화입식이라고 하죠. 그로부터 21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쇳물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회사가 창립한 지 5년여 황무지에 제철소를 짓기 시작한 지 3년여 만에 봉합 제철 일관 공정이 완성된 거예요.
선진국을 추격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발판이 드디어 마련된 거죠.
포항제철은 가동 6개월 첫 해부터 흑자를 냈습니다.
유례가 없는 경우였어요. 다들 놀랐대요.
대통령이 그랬대. 이렇게 서류가 올라왔는데 이거 뭐 0이 더 붙은 거 아니야 잘못된 거 아니야 그랬던 일본도 50년 동안 적자 얘기 우리가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뭐 이런 거죠.
그리고 2기 3기로 확장 또 제2제철소를 광양에 짓기로 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이러한 포항제철의 성공은 포항제철만의 것이 아니었어요.
일본보다 절반 이하로 싼 가격에 철을 공급한 포항제철 덕분에 한국 사회의 인프라 건설업, 조선 가전 등등 수많은 사업이 함께 커갈 수 있습니다.
평소에 누가 일본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박태준 회장은요 지일 용일 그 길이라는 철학을 얘기했다는데요.
알아야 이용할 수 극복할 수 있다는.
근데 아마 포항제철의 성공에 가장 놀라워했던 건 포철의 성공에 회의적이었던 국내 인사들과 해외 업체들도 있었겠지만요.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 일본 쪽 아니었을까
기도 해요. 자기들이 초기에 이런저런 영향을 줬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할지는 몰랐을 테 이뿐만이 아니고요.
포항제철은 설립 초기부터 그랬듯이 지속적으로 직원들을 위해서 지역사회와 주거 환경을 변화시켰고요.
유치원부터 만들고 중고등학교를 키우다가 아예 대학까지 만들었죠.
포항제철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 만들었다.
이제 대한민국이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이 필요하다.
그럼 그런 대학을 포항제철이 만들겠다면서 세운 게 바로 포항공대죠.
이거 좀 딴 얘기 같지만 국내 최초의 실업축구단 프로축구단 창설을 이끈 것도 박태준 회장이었어요.
나라가 못 살 때도 축구 경기는 할 때니까 또 한일전 등등도 치러야 하는데 선수들 지원이 필요하니까 축구단을 직접 차린 거죠.
그리고 축구단만 만든 게 아니라 국내 최초의 축구 전용 구장 스테일리아드를 신경 써서 지은 것도 박태준의 호황제철이었어요.
정부에서
저 땅도 없고 돈도 없고 못 짓겠다고 하니까 그럼 우리가 짓겠다면서 황제철이 만들었죠.
이름이 진짜 멋있지 않니? 포항 제철이잖아 철을 만들어.
근데 축구 전용구장 이름은 스틸야드.
그런데 이 스틸야드 덕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요 2002 월드컵 개최지 선정을 위해서 90년대 중반에 피파 실사단이 한국을 찾았거든요.
그런데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랬대요.
이탈리아였는데 한국이랑 월드컵에서 막 붙으니까 마
놀리는 거지 쟤네는 무슨 축구 전용 구장도 없는 나라에서 무슨 월드컵을 나와 이 비아냥거리는데 그리고 또 막 이렇게 실사단이 찾았는데 한국 월드컵 전용구장 있는 거지 한국에도 축구 전용구장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장소가 바로 스텔리아드에 포항제철이 한국 경제를 위해 포항공대를 비롯한 학교들이 한국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듯이 한국 축구를 위해서 구단과 경기장을 만들어서 결국은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던 거죠.
그리고 대통령이 바뀌고 80년대 중후반 정부가 포항제철 주식을 장외 매각해서 재벌 손에 넘기는 것 아니냐 이런 의혹이 불거졌는데 이게 결국 무산되고 박태준이 당초 했던 약속대로 포철의 발행 주식 일부를 사원들에게 배정할 수 있게 됐는데 1988년에 포항제철 임직원 1만 9천여 명이 전체 포항제철 발행 주식의 10%를 우리 사주로 배정을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당시에 박태준 회장한테 얼마를 배정받을까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0.1%가 아니라 0.01%만 있어도 그게 얼마예요 그랬는데 어땠느냐
박태준 회장은 단 한 주의 주식을 받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포항제철은 조상들의 피로 세운 회사 공적인 일을 할 때 사욕이 있으면 안 된다면서요 근데 이상하지 않아? 그때는 뭐 주식을 배정을 받는다고 해도 뭐라고 안 했을 거예요.
별로. 실제로 공이 있고 사람들이 존경하는 분위기였으니까.
근데 편지도 안 받았어.
또 포항제철소에 이어서 광양제철소 완공을 앞두고서는 포항제철이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게 될 게 앞으로 분명하니까.
포항제철은 이동통신사업 진출 계획을 세우고요.
또 박태준 회장은 포항제철이 it 사업에 10년 이상 조 단위로 거액을 투자할 계획을 세웠다는데요.
이 조단위라는 게 매년이요 포항제철에서도 그랬고 교육 사업에서 그랬고 지역사회에서도 그랬고 축구에서도 그랬고 이게 정말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새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포항제철과 박태준의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5년에 걸쳐서
포항제철을 일군 박태준에게 돌아온 건 망신을 주듯이 이루어진 세무조사와 수사 그리고 기소 또 추방과 같은 해외 체류 기간 4년이었어요.
시간이 흐르고 다시 돌아와서 명예회복을 한 박태준은 집을 팔아서 기부하고 201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포항제철에서 이름을 바꾼 포스코인으로 살았죠.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 연설에서도 포스코가 어떤 회사인지를 강조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은 회사의 종잣돈이 조상들의 피의 대가였던 사실인 것입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 그 식민지 배상금의 일부로서 우리 포항 1기 건설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포스코는 제철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죠.
이제는 뭐 무슨 배터리 기업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로.
근데 지금 그럴 수 있는 바탕에는 피해의 대가라는 대일 청구권 자금 박해준의 리더십과 그걸 뒷받침했던 수많은 포항제철 직원들의 인생을 건 노력 그리고 국민들의 성원이 있었을 테고 보통 제가 소비더머니 끝부분에 이 회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어떤 모습으로 바뀔까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데 포스코 팬에다가는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경제 그리고 이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고 우리는 어떻게 살면 좋겠느냐고 지금도 다시 묻고 싶은 고 박태준 회장의 마지막 연설로 이번 편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추억이 포스코의 역사 속에, 중국의 현대사 속에 겨울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우리 인생의 자부심과 긍지로 간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