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고 힘 있으면 군대 안 가는 게 흔할 텐데.
재벌 회장님 장남이 자원해서 해병대에 갔어요.
그게 끝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위험한 임무를 10달 넘게 수행했어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한국 최초의 스키장을 만든 사람 훗날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의 든든한 밑걸음이 되는 또 재벌 회장님이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20대 그룹을 맡아서 아버지가 하던 사업들을 성장시키
새로운 기관 사업까지 키워내서 재계 5, 6위 그룹의 회장으로 있던 사람.
또 한국에서 열린 최초의 세계 잼버리 대회를 맡아서 성공으로 이끌었고 정치까지 뛰어들어서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
또 과거나 지금이나 글을 기억하는 인사들로부터는 그 사람 참 괜찮은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
하지만 자신이 시작한 신사업의 어려움으로 인해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그룹이 해체되면서 과거에 이뤘던 사업의 업적은 물론이고요 사회공헌, 개인에 대한 평가 역시 잊혀진 채 살아가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
이번 주제는요 시멘트, 석유화학, 건설 제지, 중공업, 무역, 정보통신, 금융, 리조트 그리고 문제 자동차까지 물려받은 사업을 자신의 시대에 더 크게 꽃피웠지만 결국 무대 밖으로 퇴장해야 했던 팔방미인 김석원의 쌍용그룹입니다.
지난 8월 재계 5, 6위까지 올랐던 쌍용그룹 쌍용그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석원 회장이 별세했죠
기록을 찾아보다가 매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마 제일 매력 있는 재벌 총수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첫 부분에 말씀드린 그 인물이에요.
베트남전 당시 해병대 수색중대원으로 10개월을 복무했다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식이라도 성인이니까 뭘 하겠다고 하면 결국 말리기가 어려운 거지만요.
재벌 회장이 장남한테 월남전 참전을 허락했다는 것도 좀 신기하지 않아요? 소위 무슨 논팽이라서 어디 좀 가서 좀 사람 좀 돼서 돌아오면 좋겠다 뭐 이런 게 아니었거든요.
한국에서 인류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 유학 가서 잘 공부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귀국해서 자원입대를 하고 참전까지 하겠다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장남의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이걸 허락한 거죠.
그 아버지였던 쌍용그룹 창업주 성곡 김성곤 회장 그 역시 다른 재벌들과는 삶의 궤적이 상당히 다른 인물이었어요.
일제 강점기에 보성 전문 지금의 고려대에서 공부하다가요 잠시 공무원 생활, 은행 생활을 하고 금세 비누공장을 차려서 자기 사업을 하는 중에 원료 공급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왜? 일제 말기에 만주에서 생산된 대두유가 수송 문제로 일본에 못 가고 우리나라로 유입돼서 시중에 풀리니까 여기에다가 베팅을 해서 원료를 대량으로 확보하고 그 덕분에 광복 이후 생활물자라면 뭐든 다 부족한데 원재료 공급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남들과 달리 김성곤은 미리 확보해 둔 원료가 있으니까 계속 비누를 생산해서 큰 돈을 벌었다는 그리고 남들은 비누 만들고 남은 찌꺼기 막 신경 안 쓰고 버릴 때 이걸 이용해서 물에 섞어서 물비누까지 만들어서 돈을 더 긁어 모으고 그러고 나서 비누 사업을 더 확장했느냐
비누가 돈 된다는 사실을 알고 너도 나도 뛰어들려고 하니까 이제는 다음 단계의 제조업으로 가야겠다 비누 사업에서 번 돈을 고스란히 방직업에 풀베팅을 합니다.
일본 기업이 한국에 옮겨놓았다가 일제 패망 뒤에 방치됐던 방적기를요 미 군정청으로부터 불화받아서 일제 때 만들어진 경성방직 말고는 광복 이후에 처음 만들어진 방직공장 금성방직을 세운 거죠.
그리고 나서 2년 만에 자본금을 10배 이상 불려 만큼 성장시킵니다.
그러다가 북한의 남침으로 6.25가 발발하면서 공장이 폭격을 맞았지만, 남은 원료를 철도 기관사를 설득해가지고 피란지로 옮기고요 대구에 있던 공장에다가 원료를 넘기고 현금을 받은 게 아니라 면사를 받은 다음에 이걸 다시 팔아서 그 돈을 바탕으로 재기를 하죠.
유엔 원조자금을 받아서 규모도
확장을 하고. 그런데 여기까지 김성곤이라는 인물을 살펴보면요 친화력이랑 수환을 보여주는 장면이 계속 나타나.
왜 대학 다닐 때부터요 지금의 고려대와 연세대죠.
보성 전문가, 연희 전문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일종의 싸움을 했다는데 진짜 싸움이었나 봐.
약간 패싸움 같은 거를 매년 했었대.
그런데 막 싸우고 나면 상처도 남고 다치고 그럴 거 아니에요 그래서 보상 전문 유도부 주장이었던 김송건이요
우리끼리 신고하면 되지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면서 싸운 판을 막걸리 마시기 대회 같은 걸로 전환했다고도 하고요.
또 일제 강점기에 사업 시작한 뒤에 이념적으로 궁지에 몰릴 뻔한 일에 연루되고도 훗날 위기에서 벗어나고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일본산 기계를 불화받았을 때도 그렇고 또 피란지에서 원면을 아까 넘기고 면세를 받는 거래할 때도 그렇고 기관에서 설득하는 것도 그랬잖아요.
무산된 유엔 원조 자금 받으려고 매달릴 때도 역시 그랬고 친화력과 돌파력을 계속 보여준 거죠.
물론 이런 모습을 보고 일각에서는 인기응변에만 너무 능했던 거 아니냐 시류에 영합했던 라고도 평가 절하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아무튼 뭐 사업할 때도 그랬대요. 해외 출장을 가서 모교 그러니까 고려대 졸업생들을 만나면 반가워하면서 용돈을 그냥 막 다 털어서 줬대.
지갑까지.
현금이 없으면 어떻겠느냐 시계라도 막 풀어서 주고요.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 찾아오면 항상 요청하는 것보다 많은 액수를 쥐어 보내고 100만원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200만 원 500만 원 천만 원.
그러면서도 본인은 같은 옷을 막 비슷하게 계속 입고 다니고 약간 수수한 옷차림에 특이했어요.
코스염이 있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 것도 아니었고 검정색 지프차 타고 다니면서 현장을 누비고 서독에 방문했을 때는 현장을 본다면서 직접 갱도에 내려가기도 하고 그래서 막 광부들이랑 같이 사진 찍고 막 나와 까매진 거죠.
그리고 또 막 잘난 척한 것도 아니라서 누가 사업이 잘 되냐고 물으면 아 요새 어렵다 막 이러면서 그냥 저는 뭐 1등 안 하고 2등만 해도 된다면서 겸손하게 허허 웃고 그리고 이런 친화력을 바탕으로 정치에도 뛰어듭니다.
결국 나중까지 4번 임기 동안이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요.
그냥 이름만 올리고 뭐 이렇게 지낸 게 아니라 훗날 집권당의 재정을 맞는 최고의 실력자 중의 한 사람으로도 불렸죠.
아무튼 60년대 초반까지 비누 제조에 이어서 당직업, 언론사, 교육 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
김성곤 회장은 비누 사업을 정리할 때처럼 또 한 번 모험을 걸어서요 자신을 거부로 만들어준 금성방직을 정리하고 전 재산을 시멘트 사업에 풀 베팅하죠.
여기서 내가 거부가 됐다 그러면 그거 안 팔고 싶을 근데 그걸 팔고 시멘트 사업으로 넘어간 거죠.
그리고 1962년 첫 공장을 세운 곳이 바로 강원도 영월군 쌍용리 그래서 쌍용양회 쌍용의 그룹명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죠.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됐죠?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이 시작되고 건설업이 화랑을 맞으면서 시멘트에 걸었던 김성곤의 승부수는 엄청난 성과로 돌아오게 됩니다.
손꼽히는 재벌이자 정계의 실력자. 물론 정치 경력 막판에는 권력의 심기를 건드려서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등의 고초를 겪으면서 정계를 떠나기도 했지만 어떤 설에는 호스염까지 뽑히고 모진 일종의 고문 같은 걸 받기도 했었대요.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서 김성곤과 쌍용이라는 이름은 재계와 정치, 언론,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통 큰 베팅과 인재를 알아보고 투자하는 안목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김성곤 회장은 평소에 자녀들한테 재산을 안 물려주겠다는 얘기를 했었다는데요.
그러면서 뭐라고 했느냐 돈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부잣집 아이는 나쁜 길로 빠지기 쉽다고 했다고 하죠.
아마 결론적으로 경영권 승계를 그냥 해주지는 않겠
안 하겠다라는 얘기 정도였을까요? 실제로 김성곤 회장은 회사가 위기에 빠졌다면서 모셔온 전문 경영인이 있었는데, 이 전문 경영인도 성격이 되게 보통이 아니었나 봐.
그래서 김성곤 회장한테 고사하다가 그래 내가 전문 경영인을 할 때 회장님이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주세요.
알았어요 내가 물러나고 당신은 앉혀줄게 하니까 그래도 확답을 받아야 되니까 도장까지 다 내놓으세요.
대 선을 약간 넘은 거잖아요. 그래가지고 다 집어치워라고 할 수도 있는데 김성호 대장이 이렇게 생각하다가 허허 웃으면서 대표이사직과 도장을 넘겨준 적도 있었다니까.
자녀한테 했던 얘기들이 아예 마음에 없었던 소리는 아니었을 것 같기도 해.
아무튼 그래서인지 김성곤 회장의 장남 김석호는요 군대를 전역한 뒤에 아버지한테 그냥 돈을 받은 게 아니라 아버지한테 빌려가지고 국내 최초의 스키장을 만들기 했다고 하죠.
유학을 갔다 왔잖아. 그래서 미국에도 스키장이 있고 일본에도 스키장이 있는데 우리도 스키장이 필요할 거다 앞으로는 뭐 이런 의도여서였다고 하죠.
그런데 그랬던 장남이 만든 용평스키장이 개장한 직,
60대 초반에 불과했던 김성곤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면서 창업주의 장남은 선친의 평소 이야기와는 달리 그룹 회장직에 추대되면서 쌍용그룹의 전면에 등장하죠.
당시 만으로 29살의 나이에 그룹의 얼굴이 된 김석원 회장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과거 김석훈 회장의 인터뷰를 찾아보니까요 미국에서 아버지 사괴 소식을 듣고 날아와서 공항에 딱 내렸는데 임원들이 쫙 기다리고 있더래.
그리고 자신을 보면서 불안해하는 눈치였다고 하죠.
너무 어리잖아 자기들 앞날도 달려 있는데.
그래서 정말 어깨가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가르침을 받는 자세로 조용하게 일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렇게 젊은 총수가 이끈 쌍용은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2대 회장 시대에 더욱 탄탄대로를 걸었.
아니 70년대 중반인데 무슨 저런 걸 만들어라는 소리를 들었던 스키장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상류층을 중심으로 스키 타는 사람이 하나둘 늘고 또 대학교에서도 있는 집 자재들을 중심으로 스키 동아리도 생기면서 입소문이 나고 그리고 시멘트 사업은 공장 증설을 거듭하면서 건설품을 뒷받침하고 승승장구했죠.
또 초기 파트너의 사장으로 난항이 예상됐던 정유 사업도 새로운 합작 대상을 찾으면서 궤도에 올랐죠.
이 밖에도 종합상사, 중공업, 건설, 금융, 정보통신 등등.
쌍용그룹은 창업자의 급서 이후 들었던 여러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2세 경영 시대에 더욱 발전했다 제대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뿌듯했겠죠 젊은 회장이. 그러면서 이렇게 젊은 총수 김석원 회장은 회사 살림을 책임지면서도 외부 활동을 늘리기 시작 스카우트연맹 총재로 있던 85년에는 91년 세계 잼버리 대회 한국 유치를 성공시키는 등의 성과까지 냈죠.
생각해 봐요. 85년이면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앞두고 있잖아요.
그다음에 91년 덴보리잖아. 준비를 오죽 열심히 했겠.
그리고 김성현 회장이 자기의 거의 모든 걸 쏟아부어가지고 막 날을 정해놓고 스카우트 연맹에 출근을 해가지고 직접 일을 보고 준비를 제대로 해가지고 91년 젠보리 대회에는 굉장히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절 김석원 회장과 쌍용그룹의 행보에는 그야말로 거침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던 이 시절, 김석원의 쌍용은 훗날 그룹의 발목을 잡게 되는 신사업을 시작합니다.
자동차였어요. 놀라운
뛰어난 안전성,
고난도 패밀 쌍용자동차
1986년 쌍용은 삼성 등을 제치고요 당시 국내 최대의 버스 및 특장차 제조업체였던 동아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드는데요.
자동차에 미쳐 있을 만큼 마니아였다는 김석원 회장이 특히 열의를 보였다고 하죠.
김석원 회장이 나중에도 특이한 차량도 생산하고, 세계 뭐 얼마 안 된다는 스포츠카도 막 직접 타고 다닐 정도로 굉장히 자동차 매니아거든 레이스랑 보
나는 할 만하다 이런 얘기를 했다고도 하고요.
그리고 나서 쌍용자동차는 김석곤 회장의 선친 김성곤 회장이 타고 다녔던 차와 비슷한 코란도 생산을 지속하고, 신차도 내놓습니다.
그리고 90년대 들어 승용차 시장 진출을 앞두고선 벤츠와 기술 제휴를 해서 기존의 suv 형태만이 아니라 중대형 차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로 무소처럼 호평을 받는 신차를 출시하면서 쌍용차도 뭔가 되는 건가라는 희망을 보여준 적도 있었고요.
하지만 suv가 대세인 지금과는 달리 suv 시장이 작을 때 suv에만 강점이 있었던 쌍용차의 시장 점유율은 쉽게 증가하지 않았어요.
또 세계적인 메이커가 즐비한 자동차 업계에서 쌍용차가 세계 시장에서는 경쟁력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조차도 현대 같은 기존 메이커가 suv 시장에 들어오면서 점유율을 오히려 빼앗기기도 했죠.
준중형이 아니라 중대형으로 승용차 사업의 방향을 전환한 것도 악수가 됐어요.
또 쌍용차에 불리했던 기술 제휴 계약과 저조한 판매량이 계속 엉키면서 손실은 커져가고
그런 거죠. 방직업이나 건설업 같은 경우에 선진국 업체들이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 빠져나갈 때, 일본이 거기를 메꾸고 한국이 그걸 따라가서 이렇게 격차를 좁혀갔는데 첨단산업, 자동차 산업 같은 경우에는 선진국 업체들도 안 빠져나가고 오히려 선진국 업체들끼리 경쟁이 너무 심해가지고 도태되는 업체들도 있었는데 여기에 한국 업체들이 따라붙지 못하는 거죠.
이 격차가 좁혀지지가 않는
아무튼 그렇게 마치 밑 빠진 도개 물붓듯 자동차 사업에 들어간 막대한 자금은 회수가 될 줄 몰랐고요.
쌍용자동차뿐만 아니라 쌍용그룹 전체의 체력을 급속하게 앗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절 뜻밖의 소식이 전해지죠.
다가오는 총선을 앞두고 김석원 회장이 그룹 경영에서 손을 놓고 정계에 진출한다는 발표였어요.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이 민자당 지구당 위원장직을 맡아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재벌 총수의 정계 입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재벌 회장님이 막 5, 6위 하는 재벌인데 국회의원은 출마한 거예요.
지금으로서는 약간 상상하기가 좀 어렵 정계 진출 선언이 있었고 1년 뒤에 총선이 있었는데 그 4년 전 총선을 앞두고서도요 김석훈 회장은 정치권의 영입 압박이 계속 있었나 봐요.
그래서 그걸 피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돌연 몇 개월 유학을 떠나면서 선거를 회피했다는 얘기가 있었고
이게 왜 가냐 뭐가 지겨워졌냐 놀러 가냐 뭐 여러 가지 얘기가 있었는데 나중에 얘기가 도는 거지 그때도 총선에 출마하라 정치권에 우리 당에 들어와라 라는 얘기가 계속 압박이 있어가지고 이걸 회피하려고 떠났었다는 근데 그로부터 또 시간이 지나서 또다시 정권의 핵심 실세를 중심으로 김석훈 회장을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워낙 강력해서 이번에는 권력의 요구를 피하기에 어려웠다라고는 하지만요.
그래도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습니다. 외부뿐만 아니라 쌍용그룹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터져 나왔죠.
정치,
어떤 캠프에 감으로써 그 반대야 되는 입장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공격도 받고 말이지.
당시에 여당이 대구가 약간 텃밭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지율이 빠지니까 대구에 지지 기반이 있던 쌍용의 김석원 회장을 영입해가지고 여러 가지로 득을 봐보자, 뭐 이런 얘기들이 있었대.
그렇게 김성원 회장은 금배지를 달았지만, 자동차 시장 상황이 점점 나빠지는 가운데 국내 자동차 업체들의 부실 징후가 점점 수면 위로 굵어지기 시작했.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기아차도 대우차도 어려웠지만, 판매 차종과 시장 점유율이 적은 쌍용차의 타격은 상대적으로
더 컸습니다. 1997년 들어서 쌍용차는 강남에 있던 사옥을 매각하고 구조조정을 하면서까지, 이미 엄청난 자금을 들여서 개발한 회심의 신차를 내놓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거든요.
그리고 재계 서열 6위의 쌍용이 벤츠와 꼭 닮은 모습의 신차 체어맨을 출시한 지 얼마 안 돼서 imf 외환위기가 터졌죠.
imf 외환위기가 닥치기 직전에도 쌍용그룹은 알짜였던 제지 사업을 매각, 발표하는 등등 쌍용차로 인한 손실을 줄이려고 애를 썼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용그룹은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부채가 3조 원이 넘었던 쌍용차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우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하기로 양측이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공식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입니다.
돈을 엄청나게 들이고 막 알짜 자산까지 팔았는데, 이걸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룹 전체가 넘어갈 것 같은. 외환위기 발생 직후, 쌍용그룹은 쌍용차까지 대우에 매각한다고 발표했.
상황이 이렇게 아주 심각하게 돌아가니까 정치권으로 외유를 했던 김석원 회장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경영일선 복귀를 선언했는데요 하지만 때는 너무 늦어 있었습.
공교롭게도 회장이 자리를 비운 3년 동안 30년 넘게 쌓아온 그룹의 토대는 돌이킬 수 없이 어긋나 있었.
참고로 김석원 회장이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선거가 다시 열렸는데, 그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죠.
일종의 나비 효과가 엄청났다고나 할까 쌍용차를 팔아서 2조 원 가까운 빚을 덜어냈지만 쌍용차로 인해 줬던 채무가 여전히 쌍용그룹에는 1조 7천억 원 넘게 남아 있었.
기간산업에 가깝다는 알짜 계열사들을 많이 가졌던 쌍용한테는요 평소라면 시간만 있으면 갚을 수 있는 빚이었겠지만, 외환위기 직후의 상황은 쌍용그룹을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채무 상환 압박이 이어지면서 쌍용그룹은 제지와 자동차에 이어서 증권, 정유, 중공업 사업을 잃었고요.
건설, 그리고 김석원 회장의 첫 사업이었던 용평리조트, 그리고 그룹의 토대가 됐던 시멘트 사업까지 새 주인을 찾아가면서 쌍용그룹은 해체되고 말았죠.
시간이 흘러서 쌍용그룹의 과거 계열사들은 이름을 바꾸거나 여전히 쌍용이라는 이름을 간직한 채 꽤 남아있지만, 쌍용그룹의 성공과 해체의 중심에 있던 김석원 회장은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죠.
쌍용그룹이 사라진 이유를 두고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탈박 미인이었던 소위 오너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그러한 시기가 imf 외환위기와 맞물리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쌍용그룹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쌍용그룹 몰락의 원인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