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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류층 사람들이 사랑한 남자 지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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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23-10-18 10:00 조회 23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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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22일 막 정오를 지난 시각이었어요. 

미국 대통령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는요 핑크색 정장을 차려 입고 카퍼레이더 중이던 남편 옆자리에 앉아 있었습니. 

그리고 낮 12시 30분 존에프 케네디가 암살당하죠. 

젤클린의 옷은 남편의 피로 얼룩이 졌어요. 

당시 주변 사람들이 옷을 갈아입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하자 재클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아니, 난 그들이 남편한테 한 짓을 보여줄 거예.


그렇게 해서 워싱턴 dc로 돌아가는 에어포스원 안에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으며 취임 선서를 하던 린든 존슨 그리고 암살당한 jfk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옆에서 사진이 찍힌 재클리는 얼룩진 옷을 입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렇게 백악관으로 돌아간 재클리는 장례식에서 입을 상복을 주문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오늘 주제인 이 브랜드를 만든, 20세기를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았던 여인들이 가장 사랑했다는 디자이너 우아의 황제 지방 씨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방시를 처음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인물은요 20세기 최고의 아이콘 중에 한 명인 배우 오드리에본이었죠. 

방금 보신 영화사상 가장 유명하다는 드레스도 지방시가 만든 거고요. 

그런데 20대 중반의 청년 디자이너였던 지광 씨는 어떻게 처음 오드리예본의 선택을 받고, 또 훗날 미국 대통령 부인을 비롯해서 수많은 지체 높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게 됐을까? 위베르드 지방시 외모나 태도나 아주 우아한 인물로 유명했는데요 어떤 때든 간에 왜 말이나 행동을 절대로 함부로 하지 않는 그런 게 영향이 있었을까?


지방시는 과거 유럽의 많은 스타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날 때부터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귀족이었거든요. 

아무튼 그런데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외갓집에서 자라게 됐는데, 외가 어른들 중에는 그전부터 프랑스 왕실에서 일을 했던 실력 있는 직물공의 장인들이 있었다고 하죠. 

그리고 이 디자인에 관심 많던 외갓집 식구들이 10살짜리 소년 지방실을 파리에서 열린 박람회에 데려갔는데 거기서 이 소년이 샤넬과 랑방 등등이 만든 드레스 전시를 보게 됐다고


훗날 지방씨는 당시에 큰 영감을 받았다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언제나 내 꿈은 드레스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의 꿈을 받아들여주셨다. 

지금도 왜 어렸을 때 뭘 보고 어떤 영향을 받느냐 되게 중요하잖아요. 

그렇다고 꼭 파리나 특별한 곳을 가야만 되는 건 아닌 것 같고요. 

유튜브를 보더라도 그렇고 보는 게 되게 중요하죠. 

아무튼 어머니의 결심으로 17살 때 지방시는 고향을 떠나서 파리에 있는 예술학교에 들어가고요. 

원래는 지방시의 우상이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였어요.


그래서 발렌시아가 하우스에서 일을 하려고 찾아갔는데 르네라는 이름의 여성 책임자가 문전박대를 했다고 하죠. 

그래서 다른 디자이너들 밑에서 6년 넘게 경력을 쌓습니다. 

참고로 전에 디올편 등등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시절에 같이 일했던 동료들 중에 디올과 발망이 있었다고 하죠. 

그러니까 가령 뭐 호랑이 새끼들이 남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거죠. 

리시 를롱인가 그런 사람인데 그 밑에 디올도 있었고 발망도 있었고 지방시도 있었고 알았을까 그 사람은


내 밑에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리고 드디어 1952년 25살의 디자이너 지방 씨가 당시에 최연소로 자신의 하우스를 열고 컬렉션을 선보입니다. 

처음부터 막 언론에서 스타 탄생을 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어요. 

만드는 스타일 자체가 훌륭한 데다가 최연소죠. 

그리고 게다가 잘생겼지 키 크지 귀족 출신이지 보면 멋있어요. 

이 한 198 외신들에 따르면 당시 지방시의 옷들은요 움직임을 편하게 하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했는데 그러면 어때요? 그 실용적인 느낌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데 실용적인 느낌의 옷은 좀 멋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잖.


그런데 또 실용적인 느낌은 안 주고 은근히 화려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게 말이 되나 싶은데 그런데 또 화려한 느낌을 준다고 해서 왜 전쟁 뒤에 물자가 부족한데 저건 너무 나간 거 아니냐 너무 화려하다. 

이렇게 비판을 받았던 디오의 뉴룩 같이 사치스러운 느낌은 또 주지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남달랐던 게 지방시는 고급 옷감 가격이 엄청 뛰어서 다른 디자인 하우스들이 문을 닫을 때 오히려 자기 하우스를 그럴 때 열었다고 하고요.


근데 그렇게 문을 열었으니까 옷감 가격이 높은 걸 감당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기존에 다른 디자이너들이 쓰는 옷감에 또 얽매이지도 않는 거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쓰는 것들보다 한 3분의 1 정도 저렴한 직물을 썼다고 하고요. 

물론 옷감이 귀하고 예산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겠지만요. 

그리고 또 동시에 기성복 시장 그리고 성장하는 미국 패션 업계를 눈여겨보고 거기에 먹힐만한 옷을 만드는 노림수도 있었다고 해.


고급 맞춤곡만 있는 게 아니야. 기성복도 있지. 

그리고 유럽 시장만 있는 게 아니야. 

미국 시장이 크고 있으니까 이렇게 본 거죠. 

이런 노림수가 있으니까 왜? 너무 비싼 재료를 써서 만들면 똑같이 디자인을 사다가 흉내를 내서 만들기가 어려우니까요. 

가격도 올라가고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실제로 지방시의 디자인은요 처음부터 미국 업체들이 큰 돈을 주고 사갔어.


이뿐만이 아니라 또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파는 것도 중요하니까 유명한 모델이자 패션 사교계의 여왕을 고용해서 바이어들이랑 미디어들한테도 또 어필을 하고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이름으로 성공적인 출발을 한 이듬해 지방 씨한테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했더니 영화 의상 때문에 지방 씨를 찾아온다는 거였어요. 

이게 1953년에 있었던 일이니까요. 

1952년에 자기 하우스를 열고


그 이듬해죠. 이 해가 어떤 때냐 영화 로마의 휴일로 오드리에번이 막 스타덤에 오를 때쯤이거든요. 

그러니까 두 사람 다 업계에서는 막 빛나기 시작하는 신성이긴 한데 지명도는 기존 스타들에 비해서 좀 떨어지는 그런데 이 오드리 헵번이 영화 사브리나 촬영을 앞두고 극중 역할에 맞게 왜 파리 느낌이 나는 의상을 제대로 입고 싶어서 파리로 와가지고


핫하다는 지방시를 찾아온 거죠. 그런데 지방시 하우스에 딱 오드리본이 나타났는데 지방시가 엄청 실망했대요. 

왜 그랬을까? 실물이 별로여서 아니면 소위 매너가 안 좋아서 그런 게 전혀 아니고요. 

지방신은 햇번이 온다는 전화를 받고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해번 그러니까 캐서린 해번이 오는 줄 알고 있었대. 

그 당시에는 캐서린 햅번이 이렇게 중년 여배우인데 되게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그 캐서린 해번이 아니었던 거지.


그리고 이 오드리 번이 나타나가지고 영화 의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지방시가 어떻게 나왔느냐 우리 인력이 얼마 안 되는데 지금 20벌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하시면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거절을 하죠. 하지만 일이 풀리려면 이게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수가 많아요. 

오드레번도요 이미 만들어 놓은 옷들 중에서 내가 입어도 된다 나를 위해서 만들지 않아도 된


그래가지고 구경을 하고 지방시 스타일에 더 푹 빠지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막 저녁 먹으면서 설득하고 나는 저 옷들 입으면 돼요. 

그냥 만들 수 있는 건 몇 개 아니어도 괜찮 그래서 설득이 통해서 지방시도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이게 두 사람한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냐면요 그렇게 지방시가 만든 옷을 해버니 입고 찍은 영화 사브리나가 히트를 하고 허니 페이스가 또 히트를 하고 특히 티파니에서의 아침의 경우에는 영화뿐만 아니라 지방시의 의상도 엄청난 주목을 받고 또 지방시가 오드리 예쁜 한 사람을 위해서 평수를 만들거든요.


이 향수가 훗날 크게 성장하는 지방시의 향수 사업을 열어주기도 했. 

오드리에본의 경우에도 화려하지만 외로운 스타로서의 삶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삶을 사는 동안에 지방 씨가 오드리본의 의상을 담당해서 오드리에번이 더 주목받게 만들어주기도 했. 

그런 업무적인 면도 있지만 이 오드리에번한테 평생 동안 깊은 우정을 쌓은 친구였어요.


여러 남자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스트레스를 받고 대중의 관심이 높아져 낮아졌다가 어떻든 간에 지방신은 평생 동안 한결같이 해본 곁에 심지어 말년에는요 오드레번에 암에 걸리거든. 

그래서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가족들이랑 보내려고 고향에 가려고 하는데 몸이 많이 힘드니까 일반 비행기를 타기는 어려운 거야. 

그래서 전용기가 필요한 상황이 되니까 그걸 구해다 준 것도 지방시였죠.


그리고 그 전용기를 그냥 보낸 것도 아니에요. 

안에다가 오드리에폰이 좋아하는 꽃을 쫙 장식을 해가지고 굉장히 낭만적이지 않냐 우아하고 그러니까 왜 브랜드 엠베서더라고 하면 광고 모델 계약처럼 돼버린 지금 같은 시대랑은 완전히 다른 거죠. 

오드리에반과 지방시의 관계는 일종의 최초의 브랜드 엠베서더이자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브랜드 엠베서더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무튼 그렇게 오드레번과의 작업으로 날개를 단 지방 씨는 수많은 여성들, 연예인들은 물론이고요 특히 귀부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맨 첫 부분에 나온 캐네디 대통령의 부인이 드골 대통령을 만날 때 흰색 이브닝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걸 막 쫙 입은 걸 보고 드골 대통령이 막 이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 약간 이런 느낌도 나고 패션의 본고장이 대통령인데 이거 뭐지? 약간 이런 느낌이 있는


근데 귀부인들이 지방실을 또 좋은 날에만 찾은 것도 아니고요. 

아까 말씀드린 jfk의 장례식 때도 그랬고 이뿐만 아니라 왕위에서 스스로 물러난 영국의 윈저공 장례식 때도 부인이 지방 씨가 만든 드레스를 상복으로 입었다는 사실이 또 화제가 되기도 했. 

그러면서 1950년대부터 지방신은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자신의 우상이었던 발렌시아가와도 아주 가깝게 교분을 이어가면서 배우고 또 영향을 받고 매일 저녁 만나서 이렇게 술 한잔 하고 얘기하고


그런 게 있군요 그랬대. 그리고 50년대를 지나서 1960년대에도 그렇게 전성기를 이어가고 남성복 라인도 출시하고 라이선스 사업으로 브랜드의 무대를 확장하고 심지어 고급차 메이커랑도 같이 지방시 자동차 에디션을 만든 적도 있었어요. 

링컨 지방시 에디션이 있 콜라보 이런 거 하면 요즘 있는 일만 같은데 지금처럼 핫한 브랜드들끼리 콜라보를 그 옛날에 했던 거죠 앞서 나갔던 거지.


그러다가 70년대 후반 80년대 되면서 몸에 달라붙고 짧은 미니스커 펑키한 스타일들이 올라오면서 지방신은 저거는 그냥 돈 많은 부잣집 사모님들 옷이라서 지루하다 이런 평가가 나오니까 또 스타일에 이번에는 변화를 주고 좀 짧게 만들고 웃게도 만들고 그렇게 유행을 따라잡으면서 위상을 회복하고요. 

급기야 1980년대 후반에는 남들이 하지 않는 놀라운 행보를 이번에도 앞서서 보여.


이건 무슨 얘기냐 여러 브랜드들을 막 사들이기 시작해서 저건 진정한 명품의 행보가 아니다 상업주의에 물들어서 결국 저 회사로 간 브랜드는 빛을 다 잃을 거다라고 욕을 먹던 lvmh에다가 스스로 지방식 브랜드 넘긴 거죠. 

그러니까 명품업이 기업화되고 산업화되는 국면에서 사냥을 당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분신 같은 브랜드를 큰 배에다가 실어서 더 넓은 바다로 보냅 지방시는 그때 그 결정이 창업자가 떠난 지방시 브랜드를 어떻게 더 확장시킬 그리고 lvmh가 훗날 어떤 위상을 갖게 되는지 예상이라도 했던 걸까요?


브랜드를 매각하고 계약대로 7년을 더 머문 끝에 브랜드를 떠나는 지방시의 은퇴 무대에서는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는데요. 

그 자리에는 입생로랑을 비롯한 이 디자이너, 거장들 그리고 지방시처럼 하얀 가운을 차려 입은 직원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오드리에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지방실을 떠난 이후에요 귀족이 만든 브랜드 지방시는 돈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 같은 워킹 클래스 출신의 디자이너의 손을 거칠


이후에 또 리카르도티시, 메트리엄스 등이 이끌면서 지금의 모습을 보이고 있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요. avmh의 지방식 브랜드를 팔았잖아. 

lvmh가 후임 디자이너 선정하는 작업을 지방시랑은 상의를 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이 워킹 클래스 출신들이 기행들이 많으니까 존 갈리아노도 그렇고 막 올라가서 막


춤추고 막 이상한 옷 입고 막 알렉산도 맥킨도 워낙 독특하잖아. 

그래서 아니 이 귀족의 우아한 브랜드 지방실을 저 사람들이 하는 게 맞아 성과랑 상관없이 그런 얘기들을 하면서 막 욕을 했는데 지방신은 그런 와중에 막 물어봤을 거 아니야 어떻게 생각하냐고 근데 아까 그런 얘기 드렸잖아요. 

우아하고 남의 말 혼담 같은 거 잘 하지 않는 사람이야. 

그냥 물어봤을 때 뭐 말을 아껴 가야 된다 그럴 때 욕하지 않는 거지. 

그리고 왜 나랑 상의 안 했냐 막 이렇게 열내지도 않.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두고 훗날 외신들이 어떻게 평가를 하냐면요 귀족과 엘리트 위주로 향유하던 명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명품 산업으로 탈바꿈하는 시기에 그 시작점을 귀족이었던 지방시가 스스로 놓고 선택한 거라는 평가를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이 보통 사람들이 즐기는 명품 산업의 시작점은 귀족이었던 지방시가 낫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가장 우아했던 디자이너 지방시가 만든 브랜드 지방시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많이 핫하다가 다소 부침을 겪는 것 같아도 생각보다 레거시 브랜드가 가진 힘이라는 건 대단하니까요. 

앞으로 이 브랜드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함께 지켜보시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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